어쩌다 공부

연구의 시작 IRB

바리차 2017. 1. 6. 11:12

미국에서 리서치를 하면서 가장 번거로운 것 중의 하나는 IRB (Institutional Review Board)라 부르는 일종의 연구윤리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IRB는 연구의 대상이 사람(human subjects)일 경우, 연구과정, 목적, 또는 결과가 그 연구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 신체적/심리적/윤리적 해를 가하지 않아야 한다는 약속을 하고 승인을 받는 것이다. 연구자는 연구주제 또는 계획이 세워지는대로 IRB를 작성하고 기관승인을 받은 후에나 (정식으로) 연구에 착수할 수 있다.

작성에 필요한 내용은 연구세팅에 따라 다르다. 실험연구나 (설문 또는 인터뷰를 통해서) 일차데이터를 모으는 연구는 이차데이터를 사용하는 연구보다 작성이 까다롭다. 일단 연구대상과 연구자 간 직접적인 관계를 맺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도 많고 연구데이터를 모으는 과정도 길며 복잡하다. 연구자는 연구대상자 모집 및 선정방법, 연구 절차 등이 연구대상의 권리와 안전을 보호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연구로 인해서 연구대상에게 가는 이득(benefit)과 해(harm)가 무엇인지 자세하게 기술해야 하며, 특히 연구대상이 아동, 수감자, 정신건강에 이상이 있는 자 등 취약계층인 경우라면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차데이터를 사용하는 경우는 IRB 면제를 받을 수 있다. 그냥 면제는 아니고, 면제신청서를 제출한 후 승인을 받아야 한다. 내 연구는 주로 패널데이터를 이용하기 때문에 IRB 면제 대상이다. 면제 신청서에서 꼭 기입하는 것은, 연구대상이 identifiable 하지 않다는 것과 데이터가 안전(secure)하게 관리될 것이라는 거다. 물론 연구필요성, 목적, 방법 등의 기본적인 연구계획은 필수로 작성한다.

미국 박사과정 1년차 리서치 수업의 한 세션은 연구윤리와 IRB 작성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숙제로는 CITI (Collaboration Institutional Training Initiative) Program 이라고 하는 온라인 트래이닝 코스를 밟고 시험을 패스해야 한다. Human subjects research에 대한 내용을 숙지하고 몇 개의 객관식 문제를 풀어 총 80점 이상을 받으면 통과된다. IRB를 제출할 때 CITI Certificate도 함께 제출해야 하기 때문에 연구자에겐 반드시 필요한 절차다. 아래 항목을 보면, 어떤 내용을 숙지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5년마다 갱신을 해야 해서 나는 작년에 다시 받았다. 우와 100점이다! 싶지만, 사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 코스를 제대로 듣지 않는다. 객관식 문제 답을 찍고 나면, 바로 다음 화면에 뭐가 틀렸는지 나오고, 다시 문제를 풀 수 있기 때문에 답만 외워서 클릭클릭 하면 30분 안에 이 인증서를 받을 수 있다. 운전면허 시험공부 같다. 물론 그러면 안 된다. 1년 차에 내용을 꼼꼼히 숙지하면서 문제를 풀었더니 3시간 가까이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건 1년 차에 IRB 절차에 대해 처음 배웠을 때 나는 비로소 미국 유학을 온 보람을 느꼈다. 사실 미국의 박사 필수과정 수업은 한국에서 학부 때 배웠던 것보다 내용적인 면으로 보자면 별반 나은 게 없었다. 아는 것을 또 배우니 시간이 아깝기도 했고 수준이 생각보다 낮아 실망감도 많이 느꼈던 게 사실이다. 되돌아 보니, 미국 교육을 통해 얻은 것은 지식의 양보다는 지식을 얻는 태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인 것 같다. 연구는 당연히 윤리적이어야 하지라는 전제 하에 실용 분석 -그것도 고급연구방법을 중시하는- 을 먼저 배우는 한국에서, 연구대상은 말 그대로 "대상화" 되기가 쉽다. 특히 논문을 위한 논문을 쓰는 환경에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에피소드 하나를 얘기하자면, 석사 논문 예비심사 날이었다. 누군가 성폭행 가해/피해 청소년에 대한 연구 계획을 발표하고 있었는데, 설문내용이 굉장이 민감한 것이었다. 문항 중 "당신은 언제 성폭행을 당했습니까?" 류의 항목이 있었나보다. (비교적 늘 인자했던) 교수님 중 한 분이 불같이 화를 내시면서, 그 설문내용이 가당키나 하냐, 설문 내용은 어떻게 생각했으며 어떻게 설문을 할 것이냐, 너의 연구는 주제는 둘째 치고, 연구 진행 과정에 있어 윤리적인 측면이 하나도 고려되어 있지 않다, 그럴 거면 공부하지 말라는 식의 폭언을 하셨다. 이 사건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 동안 대부분의 논문심사가 "니 연구는 하나도 섹시하지 않아/당연한 걸 왜 연구해?/ 아무 거나 갖다붙이면 연구냐?" 는 식의 연구주제 중심의 혹평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석사생들 중 그 누구도 연구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윤리적 문제. 그 기본에 대해서는 심각히 고민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기본을 지키는 것은 귀찮은 일이다. IRB를 작성할 때마다 그렇다. 역시 그러면 안 되지만, 나는 거의 모든 연구에서, 연구 종료 단계에야 IRB 면제 신청을 한다. 대부분 논문 투고를 하기 직전,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다. 이차데이터를 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학생은 지도교수를 공동연구자로 무조건 지정해야 하기 때문에, 교수님께 사인을 받고 관련 서류들을 받는 절차도 부담스럽다. 더구나 나처럼 지도교수와 정기적인 미팅을 가지지 않는 경우는... [교수님, 오랜만... 새해 복 많이....IRB... 굽신굽신...CITI 좀...아... 없으세요? 그럼 리뉴하셔야 하는데...굽신굽신...]  그래도 오늘 또 하나의 IRB를 쓰면서 생각했다. 이 정도의 기본이라도 지키니 내가 정말 무엇을 위해 연구를 하는가 고민하게 된다는 것이다. 혼이 없어도 작성할 수 있는 서류이긴 하지만, 기본을 마치기 위해 이것저것 생각하다보면, 연구자의 양심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다시 되새기게 된다. 시작할 때도, 끝을 맺을 때도, 빠뜨리면 안 되는 것이다. 별로 거창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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