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따씨 방

첫 마라톤 후기

바리따 2017. 11. 8. 17:00

지난 칠월에 한국에 귀국한 후, 정착 하면서 팔월을 정신없이 보내고 한동안 또 운동을 멀리하게 됐다. 가만히 놔두면 운동을 안하고 퍼져있게 되는 나의 정상상태로 머지않아 돌아갈것임을 분명히 알기에, 그럴싸한 목표를 세워서 동기부여를 해보고자 했다. 작년 하프마라톤에 이어 올해 안에 42.195km를 달리는 마라톤 대회에 나가보기로.

음... 그래도 준비하는 시간이 있어야 되잖아? 그렇지만 추운 겨울은 피하고 싶은데... 하는 번민을 하면서 주요 대회 일정을 보는데, 그래 이왕이면 거리를 아는 서울이지, 하면서 11월 초에 열리는 중앙서울마라톤 대회를 덥썩 신청했다. 그러니까, 한 세달을 두고 준비시작. 

미국을 떠난 6월 부터 매달 달린 거리는 보잘것 없이 되어버려서, 기록은 생각하지 않고 완주를 목표로 했다. 중앙마라톤의 시간제한은 5시간. 음... 10k를 1시간 10분씩 뛰어도 남네 허허허 하고 천진난만한 생각으로, 10k - half 를 다시 차근차근 뛰면 뭐 무리없지 않겠나 하는 생각으로 달리는 거리를 슬슬 늘려나갔다. 

구월에는 동아공주마라톤 10k 경기에 참가해서 살짝 기분을 내보았다.

경기 후에 주는 밤막걸리를 마시며 지역 특산물을 또 하나 알게 됐다. 달짝지근한 술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 행사 후에는 언젠가 와봤을지도 모르는 무령왕릉을 관람했다. 조용하고 탁트인 기분 좋은 곳이었다 ('릉'이긴 하지만). 이때 백제문화제를 알게되서 추후에 또 공주에 왔다. 역시 역사 깊은 도시가 좋아.

시월엔 우리 동네에서 하는 충청마라톤 하프마라톤 경기에 참가했다.

교통통제가 엉망이어서 달리는 사람들을 세워두는걸 목격했다. 그런 일이 생기는 대회는 처음이고, 그런 일이 있어도 된다고 상상하기도 힘들다. 경기를 위해 많은 분들이 고생하셨을텐데, 이런 일 하나로 나쁜 인상을 갖게되서 유감이다. 경기 후에는 코요테를 봤다, 3명의 멤버 모두 생각보다 키가 작네라고 생각했다.

자 그리고 드디어 11월 중앙마라톤.

너무 늦게 준비를 시작한터라 하프 이상 뛰어보지 못한게 처음부터 마음에 걸렸지만, 완주가 목표니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레이스를 시작. 그래도 4시간 30분 안에는 들어오자는 마음을 한켠에 (심각하게) 가지고 있었다. 잠실 종합운동장을 출발해서 익숙한 방이동과 올림픽공원 앞을 지나서 수서역, 세곡동까지. 춥고 흐린 날씨에 다리가 조금 무거운 기분이 들었지만, 하프까지 무사히 달리고 자신감이 붙었다. 하프까지 달리고 나면 완주에 대한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는 예전에 본 글귀를 생각하면서, 음 페이스를 좀 올려볼까? 하는 어이없는 생각을 약 28k부근까지 했더랬다.

29k쯤되면서 아-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하고 마음을 놓으려고 하는데, 인터넷에서 봤던 "마라톤의 진짜 시작은 30k부터" "퍼진다" 라는 말들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4시간 30분에 목표를 둔 내 페이스가 빠른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호흡에 문제가 있거나 힘이 부치는건 전혀 아니었는데, 흔히 "다리가 안움직여"라고 표현하는 상태가 나에게도 찾아왔다. 아 이러면 안되는데 하고 생각하면서, 4k마다 스트레칭을 하면서 쉬엄쉬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비명을 지르는 다리에게 일정 부분 좀 져주기로 한다. 미련하게 이때까지도 4시간 30분을 아까워했지만, 4k마다가 아니고 2k마다 스트레칭을 하다못해 34k쯤 되서는 슬슬 달리는걸 멈추고 조금씩 걷게된다. "그래도 걷지는 않았다" 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모토를 나도 꼭 지키려고 했는데, 너무 쉽게도 몸에 찾아온 고통에 지고 만다. 4시간 30분은 이제 힘들어, 라던지, 그렇게 천천히 뛸바에 조금 걸어서 기운을 차리고 다시 원래 페이스로 돌아가자, 하는 얄팍한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고, 더 더 많이 걸으면서 나를 추월하는 사람들을 계속 바라본다. 최악의 기분이다.

꾸역꾸역 걷다가 뛰다가를 반복하면서 생각한다, 아 이럴바에는 그만두고 회송버스를 탈까, 걸어서 완주한들 기분이 좋을까, 아니 애초에 5시간 안에 들어갈 수는 있을까. 그렇게 비관적인 기분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이미 달려온 거리를 생각한다. 35k를 넘게왔고 10k도 안남았는데 여기서 그만두면 어떻게 하나. 혹시 앞으로 마라톤을 뛰지 않으면 (물론 가능하다면 앞으로도 계속할 마음이다) 이게 마지막인데 이렇게 끝낼수는 없지! 

그렇게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오십번정도 거쳐가면서 꾸역꾸역 오다보니, 사람들의 응원소리와 함께 다시 익숙한 잠실의 거리가 보인다. 다리는 끊어질듯이 아프고 무릎에서는 바늘로 찔린마냥 날카로운 기분이 들지만, 마지막 1k는 다시 뛰어진다 (매우 느리지만). 한참 전에 들어온 주자들이 이미 짐을 다 챙겨서 떠나는게 보이고, 이제 내 주변에 달리는 사람은 몇몇 뿐이지만, 아무래도 좋다. 이제 그만 달려도 되고, 완주는 완주니까. 감격스러운 마음을 안고 골인.

겨우겨우 5시간을 넘지는 않은 기록으로 내 첫 마라톤이 끝났다. 진지한 마음으로 준비한 것 치고는 그리 훌륭하지 못한 기록이지만, 그래도 좋았다. 기어들어오다시피해서 어머니가 차려준 성대한 밥상*2를 게걸스럽게 비우고, 아내가 사준 축하케익을 함께 불며 기뻐했다. 사흘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난 로봇병정처럼 다리를 꼿꼿히 펴고 걷는다. 다시 사람처럼 걸을 수 있게되면, 자연스럽게 다음의 목표를 위해 다시 달리려고 한다. "최악의 기분"을 느끼지 않고 42.195km를 즐겁게 달릴 수 있게 되고 싶다, 꽤 빠른 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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