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6개월 살기(25.8~26.2)

living in Barcelona: 시체스 영화제(25.10.9.~19.)

바리차 2025. 10. 18. 05:51

지난 주부터 시체스(Sitges)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가 열렸다. 시체스는 바르셀로나에서 40분 거리에 있어 근교 여행지로 유명하다. 우리도 바르셀로나에 도착하고 일주일쯤 후 시체스로 당일치기 관광을 다녀왔었다. 8월 말, 주말이라 많은 사람들이 해수욕을 하러 가는 듯 했고, 한 낮에는 휴양지의 북적거림이 있었다. 누드비치와 은퇴한 LGBT이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고 한다. 

8월 말의 시체스 해변

경쟁작 위주로 9월 말 전쟁 같았던 티켓팅을 했다. 1. 어쩔 수가 없다(박찬욱 작) 2. 프랑켄슈타인(기예르모 델토로 작) 3. THE LIFE OF CHUCK(마이클 플래너건 작). 다 다른 날 상영이었다. 그 외 EXIT8 정도를 보고 싶었지만 너무 많은 시간을 쓰는 것 같아 참았다. 두 개는 오전 8시 15분, 하나는 오전 10시 30분 상영이었고, 제 시간에 도착하려면 5시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6시에는 나가야 했다. 요즘 바르셀로나는 8시가 넘어야 해가 뜨니 꼭두새벽에 나가는 기분이었고, 밤새워 3개 영화를 연달아 봤던 대학시절이 떠올랐다.  상영관은 시체스역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인 멜리아 시체스. 공교롭게도 3개 영화 모두 여기에서 상영했고, 알고 보니 여기가 가장 메인 상영관인 것 같았다. 

THE LIFE OF CHUCK 상영 전 @ 멜리아 시체스 상영관

< 영화에 대한 짧은 기록>

1. THE LIFE OF CHUCK(10.12) - 한국에 있을 때 유튜브 영화소개 채널에서 인상깊게 본 영화라 선택. 너무 새벽부터 움직여서 중간에 졸기도 했으나 소재와 연출이 신선한 영화였다. 만약 죽는 순간의 세계가 그렇게 펼쳐진다면 죽음이 두렵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별들이 굉음을 내고 사라지는 한 세계가 무너지는 장면은 아름답게 슬펐다. 몰랐는데 이미 소개 채널에서 결말까지 다 보여준 것이었는지 그 이상의 스토리는 없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완벽하게 알아듣지는 못했기 때문에) 세 편을 모두 보고, 어떤 영화가 가장 좋았는가 하는 질문에 우리 둘 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를 택했다. 그냥 우리 취향이었다. I contain multitudes. 

2. 어쩔 수가 없다(10.14) - 여러 개의 한국 영화를 상영했지만 하나만 꼽으라면 이걸 볼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관련 영상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영화를 봤다. 한결 가벼워진(대중적이라고 할까) 박찬욱식 유머와  여전히 흥미로운 각도, 뛰어난 배우들의 농염한 연기. 한국이었으면 크게 신경쓰지 않았을 음악까지. (음악에 대한 인지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타국에서 이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를 신경쓰다보니 새삼 생경하게 느껴지는 지점들이 있었다) 나는 즐겁게 봤다. 바리따는 그래도 헤어질 결심이 더 나은 것 같다고 했다. 

3. 프랑켄슈타인(10.17) -  새롭게 만들어진 creature가 너무도 선하고 아름다웠다. shape of water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영화 중반 creature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환되는 장면에서 누군가는 환호성을 질렀다. 영화를 보고 나와 바리따씨는 테세우스의 배* 이야기를 해 주며, creature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답은 못했다. 대사 하나하나가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둘다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11월 넷플릭스에 올라오면 그 때 다시 보고 다시 얘기해 보자.  

*(나무위키 펌)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후 아테네에 귀환한 테세우스의 배를 아테네인들은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 시대까지 보존했다. 그들은 배의 판자가 썩으면 그 낡은 판자를 떼어버리고 더 튼튼한 새 판자를 그 자리에 박아 넣었다. 커다란 배에서 겨우 판자 조각 하나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이 배가 테세우스가 타고 왔던 "그 배"라는 것은 당연하다. 한 번 수리한 배에서 다시 다른 판자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낡은 판자를 갈아 끼우다 보면 어느 시점에는 테세우스가 있었던 원래의 배의 조각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는가?

 

영화가 끝나면 멜리아 시체스에서 나와 바닷길을 따라 걸었다. 걷다 중간에 누드 해변이 보이는(!) 푸드트럭존 의자에 앉아 하루는 카페라떼를 마셨고, 하루는 맥주와 클라라를 마셨다. 우리가 영화를 보러 간 첫 날은 좀비워크가 있었던 다음날이라서 좀비 페이스 페인팅을 해 주고 있었다. 축제는 최대한 즐겨야 하니 호기롭게 의자에 앉았다. 결과물은 아래. 나름 고퀄이다. 바르셀로나에 돌아와서 지하철을 탈 땐 좀 창피했지만 (같은 칸에 탄 남자아기가 날 손가락질해서 몇 사람이 웃었다) 안 했다면 또 후회했을 이벤트이다. 

ZOMBIE FACE PAINTING

10월 중순이 되니 슬슬 축제가 끝나간다. 그래도 스페인은 아직 더운 가을이고 구름이 끼지 않는 화창한 날은 늘 축제같은 기분이 든다. 오늘 잠시 머문 시체스 Palau 앞 좁은 광장에서는 춤을 추고(그룹투어 관광객이다. 까딸루냐 전통춤인 듯 하다), 그림을 그리고(할머니 둘이 그늘에 앉아 수채화를 그린다),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사실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고독한 시체스 음악가) 예술의 장을 즐겼다. 참 좋은 시절이다. 바리따씨와 겨울의 쓸쓸한 시체스도 떠나기 전에 한 번은 와 보자고 얘기하며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다.